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감동을 안겨준 한국의 영웅

황영조(사진 왼쪽), 고 손기정(사진 오른쪽)

세계인의 축제인 제23회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이 이제 17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개최되는 평창동계올림픽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국내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인만큼 더욱더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은 빛나는 활약을 해주었고 덕분에 함께 눈물짓고 기뻐할 수 있었던 국민들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감동을 준 한국인 금메달” 에 대해 알아볼까 하는데요. 선수들의 눈물과 땀이 담긴 금메달은 언제나 감동을 주기 마련이지만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던 그 날의 금메달은 언제였을까요?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하계올림픽 대회에서 ‘국민의 영웅’이 탄생했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1위로 결승테이프를 끊는 순간 대한민국 국민들의 환호가 곳곳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이 날의 금메달은 대한민국 국적을 내걸고 획득한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이었습니다. 1936년 손기정 선수가 일본 대표로 금메달을 획득해야만 했던 아픔이 있는 대한민국이었기에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금메달은 더욱 뜻깊은 메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올림픽 육상에서 대한민국 소속으로 딴 유일한 금메달이기도 하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모습


▼당시 경기 내용으로 인해 국민들은 더욱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바르셀로나 주 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인 '몬주익 언덕'에서 황영조 선수는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와 1, 2위를 다투며 선전한 끝에 1위로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치열했던 경기였던지라 황영조 선수는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자마자 바로 쓰러졌는데요. 이 일화로 인해 그는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상식


▼더욱 놀라운 사실은 황영조 선수가 원래는 마라톤 선수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1991년 우연히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했던 동아마라톤에서 3위로 입상하면서 마라톤에 데뷔한 그는 마라톤 출전 2번째만에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마라톤계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92년, 일본 벳푸의 벳푸 오이타 마라톤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2시간 10분의 벽을 깨고 2위로 입상하고 마라톤 선수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죠. 이 기세를 몰아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까지 목에 건 황영조 선수입니다.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우승


▼그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무척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젊은 시절의 금메달도 있었고, 지금의 나도 있고, 또 몇십년 뒤의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인터뷰한 그는 자신의 승부 근성도 어려웠던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를 보며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운동을 했다는 황영조 선수입니다. “육상은 돈도 빽도 통하지 않는 운동이었다.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운동했고, 그런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고교시절(강릉 명륜고) 황영조 선수 모습


▼마라톤 선수로서 그가 이토록 맹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근거로 항상 그의 뛰어난 폐활량이 꼽힙니다. 해외 탑급 마라토너들에 비해서도 큰 폐활량을 가진 황영조 선수였습니다. 이봉주선수도 황영조의 엄청난 폐활량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황영조 선수는 해녀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압도적인 폐활량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도 바닷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맥질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폐활량이 좋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농담이 섞인 인터뷰를 한 적도 있습니다.

1991년 3월 17일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에서 김재룡, 이창우에 이어 3위로 골인하고 있는 황영조

▼그가 처음 시작한 운동은 마라톤이 아니라 사이클이었습니다. 중학교 재학시절, 운동부에 들어가면 학비가 50% 면제된다고 소식을 듣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사이클부에 들어간 황영조 선수입니다. 하지만 사이클은 장비가 비싸 계속 할 형편이 되지 못해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육상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이마저도 돈 안들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생각에서 육상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늦게 시작한 육상이었지만 황영조 선수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고교 시절에도 실업 선수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냈기 때문에 졸업하는 해에 바로 국가대표로 발탁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주종목은 5000m, 1만m로 장거리 트랙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애초에 마라톤 선수는 아니었던 그는 훈련할 때도 30㎞ 이상을 뛰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로톤 금메달을 획득한 황영조


▼그러던 와중에 황영조 선수는 우연한 기회로 1991년 3월, 동아 마라톤에서 첫 마라톤 레이스에 도전하게 됩니다.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하게 된 그는 원래 20㎞ 정도, 많이 뛰면 30㎞정도를 끌어주고 빠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를 넘어섰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았을 뿐더러 30㎞를 달렸을 때는 선두권인지라 계속해서 달리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스포츠서울 - 황영조 전격 은퇴 기자회견


▼이 때, 황영조 선수는 마라톤 선수로서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훈련을 하면서도 30㎞ 이상 뛰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이상하다. 다들 왜 이리 못뛰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뛰다가 엉겁결에 3등으로 골인지점을 통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영조 선수는 이 날, “중간에 레이스를 하다가 한번 넘어졌는데 그때 그냥 '나는 원래 페이스 메이커니까'이라고 생각하고 레이스를 멈추고 빠졌다면 그 이후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귀국한 황영조


▼그리고 1991년 7월에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두번째 풀코스에 도전한 황영조 선수는 이 경기에서도 우승하면서 '마라토너 황영조'로서 본격적으로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회 신기록(2시간12분40초)으로 우승을 한 그는 안내요원의 잘못으로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다시 돌아왔기에 100m 이상을 손해봤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성취한 황영조


▼하지만 그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참가할 당시의 목표는 올림픽 출전이 다였습니다. 그가 올림픽 개막 전인 5월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인데요. 당시 상당히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지만 스스로 '죽을 병은 아니다. 고통을 이겨내자'하고 되뇌이며 훈련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몸상태이다보니 메달을 따겠다는 욕심까지는 내지 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 스타트 라인에 섰던 황영조 선수입니다. “목표는 이뤘으니 열심히 준비한만큼 미련없이, 후회없이 뛰자”라는 생각 뿐이었다고 당시 심정을 되짚었습니다.


▼황영조 선수 역시 ‘몬주익 언덕’을 경기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사전답사 후, 레이스에 많은 부담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젊은 나이였던 그는 난코스인 몬주익 언덕에서 더욱 호기롭게 경기를 펼쳐나갔습니다. 그와 함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친 모리시타 선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영조와 모리시타가 서로 경쟁하면서 레이스는 자연스럽게 빨라졌고 다른 선수들은 점점 뒤쳐졌습니다.


▼“그렇게 빨리 치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 둘도 부담이 됐겠지만 젊으니 그렇게 됐던 것같다”고 당시를 회상한 황영조 선수입니다. 메인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지켜 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마저 "둘중 한명은 완주를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마라톤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과열되어 있던 경기였습니다. 정말 대단했던 승부였습니다.


▼그렇게 몬주익 언덕 위에서만 10번 정도는 엎치락 뒤치락했던 두 선수입니다. 그리고 황영조 선수는 언덕에 올라 40㎞를 목전에 둔 지점에서 ‘내리막 스퍼트로 승부를 걸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오르막길에서 그정도로 속도를 냈으면 내리막에서는 일단 숨을 돌려야 정상이다. 그래서 모리시타는 분명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앞으로 치고 나가니까 모리시타 입장에서는 기습을 당한 셈이다.순간적으로 숨을 돌리면 내가 진다고 생각했고 계속 속력을 낼 수 밖에 없었다”


▼“둘이 뛰면 옆에서 숨소리가 다 들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숨소리가 안들렸다. 힐끗 보니 모리시타가 뒤쳐지고 있었다. 여기서 확실히 따돌리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질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달렸다. 그러자 모리시타와의 간격은 점점 커졌고 스타디움에도 내가 먼저 들어갔다. 승부수가 통한 것이다. 마지막 결승선을 앞두고 뒤를 돌아보니 모리시타가 멀리 보였다. 비로소 손을 힘껏 들 수 있었다. 결승 테이프를 끊고 그대로 트랙 바닥에 쓰러졌다.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을 돌면서 세리머니를 할 힘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서 달렸기 때문이다”라고 지금까지도 경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황영조 선수입니다.

몬주익 황영조 기념비


▼이 후, 모리시타 선수도 들어오자 마자 쓰려졌죠. 경기가 끝난 후 황영조 선수와 모리시타 두 명 모두 들 것에 실려서 의무실로 갔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에도 황영조 선수는 이러다 죽겠다 싶을만큼 힘들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던 황영조 선수입니다. 그렇기에 당시 온국민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는데요.

몬주익 황영조 기념비


▼그의 경기가 감동을 선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일본인 선수와의 피튀기는 경기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하면서 우리 국민의 한을 드디어 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영조 선수 역시 경기 직 후 인터뷰를 통해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생님이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섰던, 우리 국민의 한을 풀어 말할 수 없어 기쁘다. 태극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순간 관중석 어딘가에 앉아있을 손기정 선생님에게 달려가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라고 이 점을 언급했습니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손기정 선수도 "황영조가 내 국적을 오늘 완전히 찾아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56년만이다"라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몬주익 황영조 기념비


▼“나는 매번 마라톤을 뛸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가 이번에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레이스에 임한다”는 황영조 선수는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으로 여전히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황영조, 이봉주를 선봉에 내세웠던 ‘한국의 마라톤 황금기’는 시들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황영조 선수가 선사했던 금메달의 감동은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다시 우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줄 최고의 선수들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감동을 안겨준 한국인 금메달”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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