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군도 인정한 장군 이순신의 위대함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운 이는 이순신이고
가장 존경하는 이도 이순신
만나서 차 한 잔 하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다.
라고 했다.
백원짜리 동전과 함께 우리 일상에서 친숙한 이순신 장군은 무패전승의 기록을 가진 한민족의 최고의 장수이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도 두려워했을 만큼 위대한 장군이다. 그는 48세의 나이로 전쟁에 나갔다. 고위 관료들의 만료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 무적의 전승기록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 그 승리비결로 꼽히는 것은 뛰어난 전술, 우수한 화공능력, 철처한 대비, 주변 지형의 활용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가 가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부하 장수들과 활발한 소통을 하며 결속력을 만들어 낸 것도 중요한 비결이다. 지금부터 전쟁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그 신념과 위대한 리더십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순신의 이러한 강인함과 신념을 보면서 몰락한 집안의 출신이다 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순신의 본가 외가 처가 모두 명문 가문이었다. 부모님 양가 모두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죽마고우였던 유성용의 기록에서 이순신은 어린시절부터 영특하고 활발했으며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옳고 그름이 명확해 어른들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무과 시험을 오래 준비하며 크고 작은 부상도 많았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32세 때 무과에 급제를 했다.
2. 이순신 장군의 신념
일본의 기록에서도 이순신은 신념이 강한 장군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조선이 건국된 것은 1392년,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린 조선에서 전라좌도 통지라 임명된 이순신의 첫 부임지 여수에서 전투선을 정비하고 총통을 수리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수군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여수 앞바다에서 돌산도까지 철쇄를 걸어 메었다. 당시 전쟁은 없었지만 왜구의 출몰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부임하자마자 새로운 전투선 건조를 시작했다. 철갑을 두른 철갑선 즉 거북선을 고안해 낸 것이다.
3. 거북선을 탄생시킨 소통의 비결
이순신은 늘 병사들과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애썼다고 한다. 바둑을 두거나 활을 쏘면서 아랫사람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병사들과 전략을 세울 때 자유로운 의견들이 나올 수 있었다
외군의 강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이순신이 고민하고 있을 때, 조선의 탁월한 선박기술자 나대용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적진을 파고들 전투선 만들 것을 나대용이 주장했고, 그의 의견을 반영하여 기존의 판옥석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당시 조선과 달리 조총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편 배에 뛰어 오르는 등선백병전술을 펼쳤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화살과 포를 통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철갑을 덮어 적의 조총 공격에서 조선 수군을 보호하고, 쇠못을 박아 왜군의 백병전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또한 기존의 구조를 활용하여 사공과 포수층을 분리시켜 활동공간 확보해 효율성 높였다.
4. 이순신 장군의 애민정신
이순신의 통치철학은 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의/예/지/신에 의해서 오상지도 사랑으로 백성들의 업무를 처리했고, 누구보다도 공정하게 처리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한 누구보다도 자신의 부하들을 아끼는 장군이었다. 물론 부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갖춘 강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지닌 리더였다.
5. 판단력과 리더쉽
이순은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첫 승리의 옥포해전을 치뤘다. 이 옥포해전이 있기 전에 전라좌수군 수군들이 모여 경상도로 바다로 나가 싸우는 것에 열띤 토론으로 지체 되고있었는데 이순신의 빠른 판단과, 출전 명령으로 지원을 나갈 수 있었다. 옥포만에 도착 했을때 장졸들에게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참하게 태산같이 무게 있게 행동하라" 라며 첫 전투에서 전쟁 경험이 부족한 장졸들에게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을 건넸다. 이렇게 치룬 옥포해전은 전사자 없이 완벽한 승리를 만들었다.
6. 위대한 전략가
그가 위대한 전략가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쟁은 바로 명량해전이 아닐까 싶다. 12척의 배로 일본군의 330척의 배와 맞서 싸운 해전이다. 이 전쟁에서 그는 좁은 지형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상하였고, 일본 수군은 이 협곡에서 앞배가 격침되며 뒷배도 함께 기동을 못하게 되었고 울독목을 겨우 빠져나온 배는 100여척이였다. 게다가 주력선이었던 안택선이 해전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이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때 이순신장군이 먼저 나서 100여척의 적군이 있는 곳으로 돌진 하였고, 결과적으로 31척의 배를 격파시키게 된다. 이때 마침 썰물이 되면서 물살이 반대로 흘렀고 일본 수군은 좁은 명량에서 얽혀 물살에 따라 후퇴를 하게 되었다.
적선이 바다를 덮을 만큼 몰려온다
거북선이 적의 선단 속을 출입 횡행하면
향하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 충무공 조카 수군 이분 ‘행록’ 중 -
7년간의 전쟁 23전 23승 무적의 기록을 남긴 이순신은 소문난 원칙주의자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원칙과 기본을 꼼꼼하게 지켜 어느 자리에서든 투철한 책임감을 발휘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말이다